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군 6진 (문단 편집) == 개척 이후 == 4군의 경우 4군 설치 이후에도 [[여진족]]이 계속 대규모로 침입해오면서 철폐가 논의되어 단종 3년(1455)에 여연, 무창, 우예가 폐군, 세조 5년(1459) 자성이 폐군되었다. 주민들은 모두 강계로 이주되었으며 이후 이 곳은 폐사군이라 하여 위험 지역으로 지정되어 거주가 금지되었다. 다만 알아둬야 할 것은 4군의 철폐 조치가 영토의 포기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고 방어선상의 후퇴와 행정구역 상의 변동일 뿐이었다. 그 후 조선후기 때 폐사군의 군사적 중요성이 다시 주목을 받아 현종 5년(1664)에 후주진이, 숙종 9년(1683)에는 무창진과 자성진이 다시 설치되었으며, 순조 13년(1813)과 순조 22년(1822)에 각각 무창진과 후주진이 부로 승격되었다. 고종 6년(1869) 후주부와 무창부를 합쳐 [[후창군]]으로 개편되면서 옛 무창군 지역이 복군되었고, 자성진이 [[자성군]]으로 개편되면서 옛 여연, 자성, 우예 3군 지역이 복군되었다. 폐사군 시절에는 일반인의 거주를 금지하고 행정기관을 파했을 뿐, 변경지대 자체는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당시 폐사군 지역 등 조선의 압록강 중상류 변경지대에 사는 [[여진족]]들은 경제적 이윤 등을 위해 왕래 과정에서 조선의 의례에 어느 정도 숙여주었고, 이들을 불법적인 침입자로 간주하던 조선도 물리력의 한계에 따라 이를 따라와서 쫓은 것으로 묘사했다. 반대로 조선의 변경 백성들 중 왕조의 지방관리들의 수탈과 착취를 피해 거주가 금지된 폐사군 지역이나 [[여진족]] 지역으로 들어가 조선 정부의 관리를 피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변민(邊民)이라 불렀다. 두만강 중상류 6진 일대의 여진 부족들은 번호(藩胡)로 불리면서 번리(藩籬, Dependent State)로 복속했다. 그중 [[부령군|부령]]을 제외한 5진의 성외에 거주한 번호들은 성저야인(城底野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조선 출신의 변민(邊民)들과 밀접한 유대 관계를 가졌으며, 수령이나 변장(邊將)의 세력권에 있었으므로 항시 조선에 유리한 정보를 제공했고 변방 조선 관원의 지시에 복종하는 형태를 취했다. 또한 조선에 친부(親附)하지 않은 [[오랑캐]]가 변방에 침입하려 할 때면 번호가 즉시 조선에 연락하거나 이들을 막거나 구원하는 역할을 했다. 때문에 번호는 두만강 대안의 여진 부족들의 반감을 사는 일이 종종 있어서 여진 각부와의 충돌이 야기되기도 했고, 번호가 변경 조선 관원에게 구원을 청하는 일도 있었다. [[성종(조선)|성종]] 시기 땐 더 나아가 세종 이래로 개척된 4군 6진의 [[압록강]]-[[두만강]]을 방어선으로 삼았는데, 압록강 쪽의 방위는 수월했지만 두만강 쪽은 방어도, 자급자족도 힘들었다. 조선은 당시 국경선을 넘어 경계선을 산악 지대가 둘러싸고 있으며 농경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연변 조선족 자치주|연변]], [[훈춘시|혼춘]] 일대로 끌어올리려 했으나 조선의 국내 사정상 실행이 무산되고 만다. 이 연변, 혼춘 개척이 성공했다면 세종에 이어 또 다른 북진 정책이 전개되었을 것이고, 후에 조선을 침공하게 되는 청나라가 새롭게 일어서는 데도 많은 어려움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청은 압록강 이북에서 성장했고, 두만강 이북의 야인여진은 제대로 만주족 대우를 안 해줬기 때문에 실제로 큰 의미는 없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두만강 건너편 하산 지역의 산성 유적에서 조선시대 양식의 기와와 옹기 유물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 실제로 이미 많은 조선인과 여진인이 함께 살던 지역으로, 북진 시도 자체는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https://www.asiae.co.kr/article/2017111916013612156|#]] [[연산군]] 이후 초피 무역으로 철물과 우마가 유출되면서 여진 각부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성장하고, 조선 변장들의 횡포로 여진 각부와 번호들을 통제하기 힘들어졌다. 특히 연산군 ~ 중종 전후로 변경의 백성들은 소가 없어서 직접 밭을 갈거나 성저야인들의 집으로 찾아가 품팔이를 하며 끼니를 겨우 해결하기 일쑤였다. [[중종(조선)|중종]] ~ [[명종(조선)|명종]] 연간에는 북방 변방의 방어에 손을 놓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서 압록강 대안에 대한 조선의 정책은 건주삼위에서 온하위로 축소되었으며, 두만강 대안에서도 [[선조(조선)|선조]] 시기 [[니탕개의 난|여진족들의 대공세가 있었으나]] 막아내었다. 이후 종성도호부 근방에 [[송화강]] 유역의 [[https://ko.m.wikipedia.org/wiki/우라|홀라운(忽刺溫)]]의 부잔타이(Bujantai)[* 하질귀(何叱貴) 혹은 하질이(何叱耳)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하스후 버이러(hashū beile)라는 그의 칭호에 따른 것이다.]가 두만강 대안으로 팽창하고 조선에게 직첩을 요구하는 등 기승을 부렸으나 [[누르하치]]에게 패하면서 세력이 붕괴했으며, 조선은 두만강 연안의 여진 번호들을 영구적으로 상실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